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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인 땅] 작사 노트 (스압주의)


그림 - OpenAI DALL.E


2023년 9월 레지던시로 연천에 머무는 중에 인천의 포크 네 번째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될 곡을 만들고 있었다. 소재는 정해졌고 머릿속에 그림도 그려졌지만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가사를 매번 모바일이나 데스크탑에 있는 원노트에 옮겨 썼는데 자유롭게 생각을 펼치기에는 불편했다. 노트가 필요해 버스를 타고 전곡터미널에 있는 다이소에서 수첩을 하나 구매했다. [덮인 땅]이라는 노래에서 그리고 있는 그림들의 핍진성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분명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하는 작업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유령 놀이"라는 타이틀을 듣고 인천의 람사르습지와 간척되는 갯벌과 그곳에 머물고 거쳐 가는 수많은 철새의 판타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간석동에 살 때 밤하늘을 날며 울던 기러기 무리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간척되어 땅속에서 죽어간 영혼들이 지박령처럼 떠오른 것을 상상하였다. 거룩한 그들의 여정을 노래하며 그들이 처한 절망도 전하고 싶었다.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중,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지 정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탈락시켜 정리하는 작업은 작사에서 중요하다. 즉흥이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신중하고 멋진 일이다.


철새 / 말간 빛 - 죽어간 생명들 - 이기, 무자비 -> 좁아지는 경계 (The Beetle) : 선 - 이야기 외적인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의 개발 - 위험에 빠트리는 존재 - 슬픔 좌절


*정말 전해야 할 이야기 외에 풍경을 묘사하거나 감정을 부연하는 설명은 제외하려고 했다. 한밤 중에 기러기 떼가 날아가며 우는 이유가 늘 궁금했다. 이유보다는 어떤 말이 오가는지 궁금했다. 여기에서 시작한 상상이 노래가 만들어진 계기다.

간척지를 간석지로 쓴 게 웃기다. 간석오거리의 기러기 떼를 상상하고 있었나 보다.



화자가 상대에게 금기를 전하는 것이 곡의 주된 꼴이고 그 배경과 시간을 정확히 그려낸다. 그리고 그 풍경 속 새들의 감정까지 세세히 상상해 본다. 이 과정을 거치고 초고를 썼다.


당부하는 시점은 아직/ 육지에 도달하기 전./ 말간 빛을 보며 말한다. *하늘 위에서 말간 빛을 보기를 원했다.

거의 다 왔다 *거의 다 왔으니 힘을 내라는 격려의 말도 그리는 풍경 속에 있었지만, 이야기에 불필요하다 생각하여 삭제되었다.

규칙 설명 - 애도하라, 오래 보지 말라

아주 짧게 애도하라 / 말간 빛은 우리를 슬픔에 빠트린다.

ㄴ 인간들이 덮은 땅 - 새들은 알까? - 이런 일을 할 생명체 인간뿐 *새의 입장을 계속 상상해보니 자연을 파괴하는 생명은 인간뿐이었다.



첫 초고의 첫 가사는 "인간이 덮은 땅" / 그곳에서 (꺼진) 영혼들"이었다. 치환하거나 대체해야하는 단어는 괄호 안에 넣어 표시했다. 첫 번째 구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사실과 배경을 전달해야 한다. 누군가가 어떤 일을 저질렀고 어떤 후과가 초래되었는지 먼저 설명하고 싶었다.

"꺼진"을 대체하는 단어로 "묻힌", "발이 묶인", "기웃대다", "넘겨보다"가 후보에 올랐다.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묻힘"이 제격이었지만 너무 1차원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해결이 안 되면 그대로 두고 빠르게 넘어간다. 다른 부분들이 채워지면서 해결되는 일이 많다. 말간 빛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죽은 것이 설명되어야 했다. 그것도 아주 간결하고 똑 부러지게. 그래서 앞부분과 자연스럽게 이어 썼다.

"그곳에 묻힌 영혼들 / 말간 빛으로 떠올라 / 아직도 짓밟히고 있지"

여기서 생존해 내는 무리와 죽어버린 영혼들의 상반되는 이미지가 계속 이어져야 하기에 "묻히다"와 "떠오르다"를 사용하였다.

"아직도 짓밟히고 있지"는 간척지 위에 떠오른 빛들 위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풍경을 묘사하고 싶었다. 이내 현실을 표현할지 전경을 표현할지 고민하였다.



한 번에 해결되지 않으면 빠르게 넘어간다. 다시 말하지만, 뒤를 채우면서 미완으로 남겨둔 앞부분이 해결되기도 한다. 원래는 이렇게 급하게 쓰지 않는 편이지만 인천의 포크는 기일이 있었다.


전경을 표현한다면 시간적인 요소를 넣어야했다. 노을이 지고 밤이 찾아오면 땅에 말간 빛이 빛나는 풍경이 그려졌다. 하지만 썩 와닿지 않아서 일단 보류하였다. 철새들의 마음을 나는 알 수 없다 생각하니 이 노래를 만드는 목적성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측은지심으로 일그러진 이야기로 노래를 쓰게 된다면 그것은 올바른 일일까. 그것은 교만한 인간의 처사가 아닐까. 하지만 난 인간이니까. 당연한 한계를 인지하고 다시 이어간다. 후렴은 애도하는 목적과 모습 그리고 그들의 규칙이 들어가야했다.



규칙은 대자연의 (무엇)이 되어야 했고 그 무엇을 설명할 좋은 단어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두 번째 구(Verse)에 대자연의 (무엇)을 설명하기로 했다. 두 번째 구에 규칙을 설명하였기에 후렴에 애도하는 모습과 목적이 아닌 감정을 배치하는 쪽으로 바꿨다. 후렴은 빨리 토대가 완성되었다. 화자의 "아이야"라는 호소는 화자와 상대방의 관계와 감정선이 잘 설명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노랫말을 쓰고 멜로디를 쓰는데 후렴구는 동시에 만들어졌고 이후 후렴구의 노랫말은 멜로디에 맞춰서 수정되었다.


임시로 구매한 작은 노트에 생각을 옮기며 피로감을 느낄 때쯤 공연장에서 팬분께서 탐조책방에서 제작된 무지 노트를 선물로 주셨다. (다시 한번 더 감사합니다) 이제는 보류했던 부분들을 다시 살펴본다. 인간을 칭하는 말로 "저들"을 택했다. "말간 빛으로 떠올라" 다음은 여전히 확정되지 못한 채 넘어간다. 후렴에서 전해지는 새들의 박탈감과 생존의 갈망이 느껴져서 좋았다. 새들의 입장을 상상할수록 이입되는 감정이 고스란히 옮겨졌다.



작업 시간을 줄이기 위해 편곡과 음악적인 부분도 함께 생각하기로 한다.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바로 기재하기로 한다. 왼쪽은 운율과 상관없이 넣고 싶은 이야기를 옮겨보았고 오른쪽은 음악 외적인 부분과 내적인 부분의 방향을 다시 잡았다.


"덮인 땅"을 만들기 전에 정한 과업이다.


  • 복잡하지 않고 가장 밝은 C리디안 모드로 곡을 쓰기로 했다. 처음 써보는 모드 곡이라서 다진이의 이론 수업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 가장 밝은 스케일인 리디안 모드를 어두운 분위기의 곡으로 만들면 어떨지 궁금했다.

  • 천구라는 단어를 꼭 넣어보자.

  • 묘사로 그치는 것이 아닌 상상력에서 이어지는 확장성을 가져오고 싶었다. 철학은 넣고 싶지 않았다.

  • 정규 앨범을 통해 보여준 밴드 사운드, 그 이후 발매된 EP 앨범으로 어쿠스틱 사운드를 들려줬으니 다른 성질의 사운드 소스를 과감히 사용하여 다른 모습을 보여주자. 일렉기타 녹음과 더불어 다양한 가상악기를 구매했다. 구매한 가상악기를 모두 사용하진 못했다.



첫 소절이 중요했는데 "저들이 뒤덮은 땅"이 위화감은 없지만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저들이"만 대체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제약이 있고 새들의 관점에서 표현할 수 있는 말로 새롭게 교체했다. 그래서 "솜털이 나지 않는 땅"으로 확정했다. 어린 생명도 피어나지 않는 땅을 새의 관점에서 표현하는 좋은 문장이었다.



새의 관점에서 쓴 첫 구절 이후 "그곳에 묻혀버린 영혼들"의 "영혼들"도 교체해야 했다. 그리고 "말간 빛으로 떠올라" 이후에는 화자가 애도하는 장면을 넣기로 한다.



"묻히다"와 "떠오르다"처럼 상반되는 이미지를 위해 "땅"과 상반되는 "천구",날개" 등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기로 한다. "영혼들"을 대체하는 단어로 "고동"을 택한다. "묻혀버린"이 사실 어색하지만, 자비 없는 인간의 행위를 은연중에 넣기 위해 "-버린"을 넣었다.


작고 순수한 생명을 지칭하는. 새들이 말함직한 무언가


"말간 빛으로 떠올라" 이후 애도의 장면을 위해 다시 정리하였다. 1안은 전경과 배경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애도에 집착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여 처음 계획대로 전경, 배경을 전달하는 방향이 고려되었다. 2안은 그대로 애도의 장면을 표현한다. 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상대방에게 애도를 명령하는 장면으로 넣기로 한다. 첫 소절에 쓴 "저들"을 여기로 가져와 화자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한 장치로 사용했다.


저들의 ( )함을 애도하라.


*글씨를 쓸 때는 노트를 오른쪽으로 90도 돌려서 왼손으로 글씨를 쓴다. 그래서 왼쪽은 대체로 오른쪽을 다 채운 후에 쓴다.



이어서 "저들의 (무엇)을 애도하라"에서 화자가 생각하는 저들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했다. 새들은 빛들이 본인들의 천적인지 먹이인지 동료인지 알지 못한다. 새들이 빛들을 총칭할 수 있는 것은 순환되는 자연의 숭고함에 가까웠다. 그래서 "끊어지는 순환을 애도하라"로 쓴 이후 "말라버린 순환을 애도하라"로 수정되었다. 사라진 생명력과 갯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적절한 단어다. 그리고 두 번째 구는 화자의 무리가 살아남기 위해 지켜야 할 금기의 설명으로 채웠다.



보충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2절에 넣었다. 화자가 인간을 칭하는 말로 "저들"을 "헤집는 이"로 수정하여 2절 첫 번째 구의 시작을 열었다. 간척지에 말간 빛들이 무수히 빛나고 있는데 인간들은 그 빛을 보지 못한 채 짓밟고 가는 장면을 상상했다.

연천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해오라기 한 마리를 보았다. 그 뒤로 중장비들이 천을 파헤치고 있었다. 해오라기는 나를 피하지 않고 쏘아보고 있었다. 이후 숙소로 "헤집는 이"를 적어주었다. 이후 연천에서의 레지던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데모를 완성했다. 데모는 2절 후렴을 똑같이 반복했는데 새들의 결연함을 넣고 싶었다. 화자는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라고 상정했기 때문이다.

아이야 나아가라 / 굳게 닫힌 물길과 / 돌아오지 않는 만조가 / 우리를 잊더라도 /

2절 후렴을 다시 쓸 때쯤에 영화 "수라"를 보았고 2절 노랫말을 쓰는 데 도움이 되었다. 두 번의 후렴 이후 거룩한 여정의 금기를 어기고 빛이 되어버린 아이의 이야기가 마지막을 알린다.


음악적인 부분 외에 상상력이 발휘되는 서사를 위해 많은 요소들을 고려하였다. 손으로 하나씩 적어둔 기록들을 보며 노랫말이 어떤 방향으로 어떤 생각으로 바뀌었는지 알 수 있었다. 생각은 언제든 휘발되기에 시간이 더 지나면 기록을 보고도 당시의 의도들이 떠오르지 않을까봐 글과 기억들을 이곳에 옮긴다. 이만큼 열심히 하고 있고 스스로 과소평가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훗날 노랫말을 쓸 때 좋은 지침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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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도형 이
도형 이
Feb 08, 2024

잘 봤습니다. 노래 들을 때 가사에 좀 더 집중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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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 Yoodong
Jeon Yoodong
Feb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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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을 남겨주시다니...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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